L'amour c'est pour rien
Comme une salamandre,
l'amour est merveilleux
Et renait de ses cendres comme
l'oiseau de feu
nul ne peut le contraindre
Pour lui donner la vie
Et rien ne peut l'eteindre
Sinon l'eau de l'oubli.
사랑이란 전설속의 불도마뱀처럼 경이롭고,
불새처럼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요.
어떠한 것도 사랑의 생명을 끌 수는 없답니다.
다만 망각의 바다만이
사랑의 불을 끌 수 있지요.
L'amour, c'est pour rien.
Tu ne peux pas le vendre.
L'amour, c'est pour rien.
Tu ne peux l'acheter.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팔 수 없지요.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살 수 없지요.
Quand ton corps se reveille
Tu te mets a trembler.
Mais si ton coeur s'eveille,
Tu te mets a rever.
Tu reves d'un echange avec un autre aveu,
Car ces frissons etranges
Ne vivent que par deux.
당신이 사랑에 눈뜰 때면
근심이 시작된답니다.
당신이 사랑에 빠질 때면
꿈을 꾸기 시작하지요.
알 수 없는 이 사랑의 전율은
둘만이 느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랑의 고백을 서로 꿈꾸게 된답니다.
L'amour, c'est pour rien.
Tu ne peux pas le vendre
L'amour, c'est pour rien.
Tu ne peux l'acheter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팔 수 없지요.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살 수 없지요.
L'amour, c'est l'esperance,
Sans raison et sans loi.
L'amour comme la chance
Ne se merite pas.
Il y a sur terre un etre
Qui t'aime a la folie,
Sans meme te reconnaitre
Pret a donner sa vie.
사랑, 그것은 이유도 없고,
법칙도 없는 희망이랍니다.
사랑과 행운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요.
당신을 알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답니다.
저의 모든 인생을 맡길 것입니다.
L'amour, c'est pour rien.
Tu ne peux pas le prendre.
L'amour, c'est pour rien.
Mais tu peux le donner.
L'amour, c'est pour rien.
L'amour, c'est pour rien.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뺏을 수 없지요.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지요.
그러나 당신은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앙리꼬 마샤스는 1938년 12월 11일 아프리카의 알제리에 있는 콘스탄틴(Constantine,
Algeri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태생이며
모두 유태교 신자였다.
콩스탕틴에서 아랍과 안달루시아 음악을 연주하던 셰크 레몽 레리스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아버지 Sylvain Ghrenassia(1914–2004)의 영향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특히 기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15세 때 나중에 그의 장인이 된 셰크 레몽의 오케스트라에 정식 단원이 되어 활동을
하였다. 이후 미래가 불확실했던 음악을 잠시 떠나 초등학교에서 문법과 철자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기타에 대한 강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무렵 알제리는 19세기 초부터 이어져온 프랑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한창이었다. 격렬한 내전 속에서 사랑하는 친지를 잃은 그는 결국 1961년 아내 수지(Suzy)
와 함께 고향을 떠나 프랑스행 배를 탔다.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 망명자 신세가 되어야 했던 그는 배 위에서 눈물을 삼키며 이후
자신의 첫 앨범에 수록된 노래 '내 나라여 안녕(Adieu Mon Pays)'을 쓴다.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이주한 그는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1961년 파리로 와서 '황금이불'
이라는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그는 1962년 레이블 '파테(Pathe)'와 계약을 맺고 첫 앨범
'Adieu Mon Pays'을 발표한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질베르 베꼬(Gilbert Becaud)'의 라이브에서 첫 무대에 섰고,
이듬해에 첫 투어를 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전역에 걸쳐 유행하던 '예예(ye-ye : 세계 제2차 대전 후의 베이비붐 세대,
즉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대보다도 풍요로운 시기를 누린 젊은 세대가 주도한
1960년대 초반의 로큰롤 문화)'의 열풍 속에서 ''가스통 그레나시아'라는 이름을
'앙리꼬 마시아스'로 바꾼 그는 196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프랑스는 물론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인종과 종교와 국가, 이념을 초월하여 사랑과 평화를 주제로 한 그의 노래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냈고 앨범은 꾸준히 팔려나갔으며, 그는 명실공히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북쪽 사람들', '아니, 난 잊지 않았더', '예루살렘의 크리스마스' 등 주목할 만한 곡들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1970년대에 그는 이미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투어가 이어졌고, 1976년에는 아름다운 곡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불행
(Malheur ACelui Qui Bless un Enfant)'이 수록된 앨범 'Mélisa'로 골드디스크를
수상한다.
1978년에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렬의 초청으로 피라미드 아래에서 2만 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콘서트를 마쳤다.
1980년 11월 UN사무총장인 '쿠르트 발트하임(Kurt Waldheim)'은 그에게 '평화의 가수
(Chanteur de la Paix)'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1997년에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으로부터 UN평화대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의 독특한 이력으로는 1964년에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하였는데, 'Declic et des
Claques', 2001sus 'La Verite Si Je Mens! 2', 2006sus 'Un Ticket Pour L'Espace'
에도 출연하였다.
그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La France De Mon Enfance)'와
'이 모든 이유로 나는 너를 사랑해(Pour Toutes ces Raisons, Je T'aime)', 문 좀 열어줘
(Ouvre moi la porte)' 등은 이 시기에 새로운 레이블 '트레마(Trema)'를 통해 발표된
곡이다.
이듬해 발표된 앨범 '한 양치기의 죽음(Un Berger Vient de Tomber)'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타이틀 곡은 암살된 사다트 대통령에게 바치는 작품이었다.
빠른 템포의 전자음향이 가미된 1984년 발표작 '진정한 용기(Generosite)'는
우리나라에서도 라이센스로 소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고, 하모니카 연주와 여성보컬과
듀오로 노래하는 '녹슨 총'은 당시 드라마 주제곡으로 사용되어 라디오 방송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아스니에(Asnieres)'어린이 합창단과 노래한 '동심(Coeur D'Enfant)'과 서정적인 발라드
'아이들이 이렇게 자란 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Je N'ai pas vu mes enfants
Grandir)'도 인기를 얻은 곡들이다.